엔터프라이즈 이야기(4)-1942년 개요
1942년이 시작되었을 때 엔터프라이즈는 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 중의 한척이었을 뿐으로 해군관계자가 아닌 한 이 배의 이름을 한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1942년이 저물 때쯤에는 전세계에서 적어도 가끔씩이라도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영화를 보는 사람 중에서 이 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1942년 한해는 엔터프라이즈에게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일단 굵직굵직한 사건들만 해도 4월 18일에는 둘리틀 중령의 비행대가 일본의 수도 도쿄를 공습했고, 5월 7일에는 산호해에서 미국과 일본의 함대가 사상 최초의 함대항공전을 치렀으며(산호해 해전) 6월 4일에는 유명한 미드웨이 해전이 벌어졌다.
2달 후인 8월 7일에는 미해병대가 과달카날 섬에 상륙하여 일본군과 6개월에 걸친 사투를 시작했다.
8월 24일에는 과달카날 근해에서 3번째의 함대 항공전인 동부 솔로몬 해전이 벌어져서 엔터프라이즈가 지옥 문턱까지 다녀왔고 10월 26일에는 4번째의 함대항공전인 산타크루즈 해전이 벌어졌다.
11월 15일에는 리 제독이 지휘하는 신예전함 워싱턴이 일본전함 기리시마를 일방적으로 두들겨패서 가라앉히면서(과달카날 해전) 과달카날 근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엔터프라이즈는 산호해 해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작전에 직간접적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투의 와중에서 태평양함대의 동료 항공모함들이 하나씩 격침됨으로써 살아남은 엔터프라이즈에게 주어진 부담과 중요성도 높아졌다.
우선 렉싱턴이 산호해 해전에서 격침되었고, 그곳에서 살아남아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던 자매함 요크타운도 결국 미드웨이 해전에서 최후를 맞았다.
8월31일에는 새러토가가 1월 11일에 이어서 두번째로 일본잠수함의 어뢰에 피격되어 진주만의 건선거에 들어앉아 있어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고 9월 16일에는 과달카날 근해에서 호송임무를 수행하던 와스프가 일본잠수함의 어뢰 3발을 맞고 최후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호넷마저 10월 26일에 벌어진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침몰해버리자 이제 새러토가가 수리를 마치고 전열에 복귀한 12월 5일까지 태평양함대에 항공모함이라고는 엔터프라이즈 한척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엔터프라이즈 승조원들의 심정을 잘 나타낸 말이 산타크루즈 해전 직후 격납고 갑판에 누군가가 페인트로 굵게 썼다는 다음의 구문이라고 생각된다.
"Enterprise vs. Japan"
이렇듯 1942년은 엔터프라이즈에게는 세계해전사에 영원히 남을 명성을 얻게 해준 시절이기도 하지만 함정과 항공기의 승무원에게는 힘들고 괴로운 시기이기도 했다.
1942년 한해동안 엔터프라이즈는 6발의 폭탄을 맞아 최소한 300명 이상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또한 1942년은 해전사에서 엔터프라이즈의 이름을 쉽게 접해볼 수 있는 마지막 시기다.
1943년이 되어 에식스급 항공모함들이 대거 태평양함대에 합류하면서부터는 엔터프라이즈의 이름은-다른 항공모함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전투서열에서나 찾아볼 수 있지 일반적인 기술에서는 단지 제58(또는 제38)기동부대로 나올 뿐이다.
1943년 이후의 해전사 기술에서 미국의 개별 항공모함의 이름이 거론될 경우는 기함이 아닌 한 대부분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경우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