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및 그 이전/말레이 해전

말레이 해전(22)-분석(2)

대사(PW) 2018. 3. 16. 08:00

22. 분석(2) - 오판의 원인

 

1941년 12월 9일 자정에 쿠안탄 상륙 보고를 받았을 때 필립스 제독이 쿠안탄으로 가기로 결정한 사실 자체를 비판하기는 어렵다.

당시 필립스 제독은 쿠안탄 상륙이 잘못된 정보라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고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쿠안탄으로 가기로 한 결정 자체는 수긍할 수 있다.

 

문제는 쿠안탄에 접근한 10일 오전이었다.

10일 오전 7시 18분에 사출한 왈루스 수상정찰기가 쿠안탄에 상륙 징조가 없다고 보고했을 때 필립스 제독은 바로 철수해야 했다.

더 이상 기습할 일도 없으니 그 시점에서 무선침묵을 풀고 항공엄호를 요청하면서 싱가포르로 후퇴했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필립스 제독은 확인을 위하여 쿠안탄에 익스프레스를 파견하여 2시간을 허비했는데 이것은 치명적이었다.

바지를 끌고가던 작은 선박을 조사하기 위하여 Z 부대 전체를 이끌고 북상한 결정도 엉뚱했다.

꼭 조사가 필요하다면 주력은 철수하면서 구축함 1척만 보내도 충분했다.

 

마지막 실수는 오전 10시 15분에 호아시 소위의 정찰기를 발견했을 때였다.

발견 즉시 무선침묵을 해제하고 항공엄호를 요청했다면 말레이 해전의 경과는 바뀌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때가 마지막 기회였다.

 

실제로 Z 부대가 항공엄호를 요청한 시간은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첫번째 어뢰를 맞은 이후인 오전 11시 58분이었다.

22분 후인 12시 20분에 셈바왕 기지에서 제453전투비행대대가 이륙했고 1시간 동안 날아서 오후 1시 20분에 전투해역에 도착했다.

 

만일 Z 부대가 호아시의 정찰기를 발견한 후 3분 만인 오전 10시 18분에 항공엄호를 요청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조건이 같다면 22분 후인 오전 10시 40분에 셈바왕 기지에서 제453전투비행대대가 이륙했을 것이고 1시간 동안 날아서 오전 11시 40분에 전투해역에 도착했을 것이다.

오전 11시 40분은 일본군의 1차 뇌격이 시작된 시간이다.

 

이후의 경과를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전투기의 호위없이 공격하는 일본의 육상공격기들에게 버팔로 10대는 상당한 위협이 되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말레이 해전의 결과도 바뀌었을 것이다.

일본기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며 전함 2척도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많다.

최악의 경우라도 전함 2척을 모두 상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필립스 제독은 왜 호아시 정찰기를 보았을 때 즉시 항공엄호를 요청하지 않았을까?

우선 지적되는 것은 일본 뇌격기에 대한 필립스 제독의 인식이다.

필립스 제독은 항행 중인 전함에게 폭탄은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일본기들은 프린스오브웨일스와 리펄스에 각각 1발의 폭탄을 명중시켰지만 함체에는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폭탄과 달리 항공어뢰는 항행 중인 전함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었고 필립스 제독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전함에게 큰 피해를 입힌 뇌격기는 모두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함재기였다.

비스마르크의 기동력을 빼앗고 타란토에서 이탈리아 전함들을 가라앉힌 뇌격기는 영국항모에서 이함한 소드피시 뇌격기였으며 진주만에서 미국전함들을 때려부순 뇌격기도 역시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97식함상공격기였다.

필립스 제독은 Z 부대를 공격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일본항공모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지상발진항공기들 중에서도 이탈리아의 사보이아-마르케티 SM.79 나 영국의 뷰포트처럼 뇌격이 가능한 기종이 있었고 필립스 제독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필립스 제독은 사이공 부근에 전개 중인 일본항공기의 세력도 상당히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육상공격기는 개전 직후 싱가포르를 폭격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독은 영국이나 이탈리아에 형편없이 떨어지는 일본의 항공기술로는 사이공에서 쿠안탄까지 날아와서 뇌격을 가할 항공기를 만들 수 없다고 믿었다.

 

(사보이아-마르케티 SM.79.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https://en.wikipedia.org/wiki/Savoia-Marchetti_SM.79)

 

잘못된 믿음이었다.

적어도 뇌격기에 관한 한 당시 일본은 세계를 선도하고 있었다.

일본의 항공기술에 대한 과소평가는 다른 장교도 마찬가지로 Z 부대에 대한 뇌격이 시작되자 나름대로 항공기술에 정통한 젊은 장교를 포함한 많은 장교가 일본이 그 먼거리까지 뇌격기를 보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쿠안탄에서 필립스 제독이 항공엄호를 요청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팔리서 소장이 9일 오후 10시 43분에 보낸 전문

(http://blog.naver.com/imkcs0425/220409881729)에서 이유를 찾는 견해도 있다.

팔리서 소장은 이 전문에서 10일에 싱고라 상공에서 전투기 엄호가 불가능하다는 내용을 전하면서 '싱고라 상공'('off Singora')라는 말을 뺐다.

출항 전 필립스 제독이 10일에 싱고라 상공의 항공엄호를 요청했기 때문에 굳이 그 말을 넣을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필립스 제독은 싱고라 상공이라는 말이 빠진 전문을 보고 싱가포르의 전투기 상황이 너무 나빠 10일에는 싱고라 상공 뿐 아니라 쿠안탄을 포함한 어디에서든 전투기에 의한 엄호가 불가능하다고 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필립스 제독이 마지막까지 전투기 파견 요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일본기의 공습 상황에서 Z 부대의 움직임은 나쁘지 않았다.

처음에 필립스 제독은 함대 행동을 고집하여 대공포화의 효율을 떨어뜨렸으나 잘못을 깨닫고 함정들의 자유행동을 허가했다.

첫번쨰 어뢰에 맞을 때 프린스오브웨일스는 너무나 재수가 없었으며 그 결과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특히 통신의 두절로 비효율적인 보수가 이루어지면서 피해를 키웠다. 

 

리펄스는 잘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테넌트 함장이나 리펄스의 승조원을 비판하는 역사가는 없다.

 

3척의 구축함도 최선을 다했으나 어차피 빈약한 대공화기로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대신 구축함들은 구조작업을 제대로 실시하여 전사자의 숫자를 줄였다.

 

참패에 따른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시자 영국의 언론과 정가는 비판을 시작했다.

언론은 필립스 제독이 항공엄호를 요청하지 않은 이유를 따졌다.

12월 19일에 하원에서는 전함의 극동 파견 결정, 항공모함이 동행하지 않은 이유, 나아가 참패를 불러온 전반적인 지도 문제를 따지는 비밀 토론이 열렸다.

처칠 수상은 루스벨트 대통령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에 대신 해상 알렉산더 경이 참석하여 의원들의 비판을  한몸에 받았다.

 

전쟁내각과 해군성은 최신전함인 프린스오브웨일스가 단 1발의 어뢰로 치명적인 피해를 받은 이유를 밝히기 위하여 1942년 3월 16일에 버크닐 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는 생존자의 증언을 듣고 진술서를 조사하는 이외에도 극동 파견 이전에 프린스오브웨일스에게 일어난 일들을 조사하고 동급함인 앤슨에 전문가를 파견하는 등 다각도로 조사했다.

그 결과 어뢰에 의하여 A 지지대가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으나 뾰족한 대책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위원회는 독일 방식을 받아들여 전함에 3개의 추진축을 사용하라는 권고를 내려다가 포기했다.

 

다른 문제는 어뢰 1발로 프린스오브웨일스의 전기 계통이 큰 피해를 입은 사실이었다.

해군성은 1938년 7월에 함정에 전기배선을 깔 때 지켜야 할 18가지 원칙을 만들었으나 킹조지5세급은 급히 건조하느라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버크닐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해군성은 모든 킹조지5세급 전함의 전기 계통을 개수하여 취약점을 줄였다.

 

이외에도 몇 가지 개선점이 제시되었다.

유사시 보수관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함내의 통신 두절에 대비하여 예비 통신망을 만드는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말라는 권고도 받아들여졌다.

또한 침수시 환기관을 타고 물이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환기관의  경로도 바꾸었다.

함의 발전기에는 독립적인 방수시설을 하여 발전기가 있는 기계실이 침수되어도 최대한 오랫동안 전기 공급이 유지되게 했다.

 

말레이 해전은 극동에서 영국의 위신을 떨어뜨렸다.

일본군에게 얻어터지는 영국군의 모습을 지켜본 현지인들은 그들의 지배자에게 품어왔던 경외심을 잃었고 다시는 회복되지 않았다.

같은 백인 국가인 호주와 뉴질랜드도 영향을 받았다.

두 나라는 비록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영국에 충성을 바치며 함께 싸웠지만 점점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과 두 국가와의 관계는 전쟁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소원해진 상태였다.

마치 본가와 작은 집 같은 전쟁 전의 끈끈한 관계는 영원히 사라졌다.

 

군사적인 면으로 보았을 때 말레이 해전은 전함의 시대를 끝장내었다.

1,500여명의 승조원이 타고 있는 비싸고 느린 전함은 이제 대량생산이 가능한 날렵한 항공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강력한 전함이라도 항공엄호 없이 적의 항공기 세력권 내에 들어가는 일은 자살행위가 되었다.

말레이 해전은 진주만 기습과 함께 전함의 시대를 끝장내고 항공모함을 해군력의 중심에 놓았다.